소설백업

001

notion6543 2024. 11. 27. 21:30

남성향 미소녀물임. 취향이 아닌 분은 읽지마셔요...



***

얇게 쌓인 첫눈이 발 밑에서 뽀득뽀득 소리를 냈다.
16살 남짓 되어보이는 단정한 옷을 입은 소년이 한손 도끼를 들고 그 작은 도끼로도 충분할 만한 나무를 팼다.
노을이 지기 시작하자 지게가 땔목으로 가득 찼다.
소년은 지게 위에 도끼를 단단히 묶어 지고 숲을 나섰다.
초겨울의 숲은 앙상해서 진작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칠이 벗겨져 듬성듬성 회색이 드러난 하얀 3층짜리 저택은 황량한 벌판에 덩그러니 홀로 서있었는데 그나마도 1층에만 불이 켜져있었다.
저택 앞에 도착한 레오는 황량한 정원을 그대로 지나 정문을 힘껏 열었다.
“집사장! 나 왔어!”
“레오 도련님, 귀가하십니까!”
머리가 새하얗게 샌 왜소한 노인이 잰걸음으로 그를 맞이했다.
집사장은 집사장이라는 타이틀에 비해 조금은 편한 정장차림이었다.
“그래, 도와줘요.”
집사장은 지게 내리는 것을 도왔다.
레오는 그제야 허리를 펴고 아이고~ 침음성을 냈다.
레오의 집안, 배크힌 가는 몰락귀족 집안이었다.
마을 규모의 작은 영지는 광산업이 주 수입원이었는데 30년 전부터 광산이 동날 조짐이 있었으나 손도 쓰지 못한 채 쇠락하고 말았다.
광산에서 나오던 광물은 ‘인형’에 쓰이는 코어였는데 ‘인형’이란 인간의 모습을 한 전쟁병기로 귀족들에 의해서만 사용되는 귀한 물건이다.
배크힌 가에도 예전엔 ‘인형’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집에 아직 ‘인형’이 있었더라면, 기숙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공부를 해 집안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형’을 다뤄본 적은 커녕, 이 두 눈에 담아본 적도 없지만 말이다.
‘책으로는 많이 봤지만 말이지....’
레오는 인형이 좋았다. 소년, 소녀의 모습을 하고 인간의 명령에 따라 호쾌하게 싸우는 강력하고 아름다운 무기.
그 모습을 실제로 보고, 경험해보고 싶다.
소망과 결핍은 인형에 관련된 책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레오는 인형에 관한 책을 잔뜩 읽었다.
읽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머릿속에서는 수도 없이 인형을 조종했다.
레오는 자기도 모르게 예전엔 퀄리티 좋은 코어를 잔뜩 보유하고 있었던 텅빈 광산 방향을 응시했다.
“레오~!! 집사장~!!”
멀리서 쨍하고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방 쪽에서 주방메이드와 똑같은 앞치마를 한 어머니가 국자를 흔들고 있었다.
“밥먹자꾸나!”

식사테이블엔 사용인들을 포함한 온 가족이 앉았다.
아니, 멀리 돈벌러간 형님과 병으로 누워계시는 아니, 아버지는 몇 주 전에 돌아가셨다. 병으로 몇년을 방에서 누워만 계시다 돌아가셔서 아직도 방에서 홀로 식사를 하고 계실 것만 같다.
어머니, 나, 메이드 세 명, 집사장, 풋맨, 정원사 한 명까지 모두 8명.
메이드도, 정원사도, 풋맨도 업무 구분이 없고, 어머니와 나도 당연히 집안일을 해야하는 상태지만 말이다. 그냥 직책이 그렇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 집은 귀족이고, 사용인이고 할 것 없이 가족같이 지내고 있는 상태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서서히 영지의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내가 태어날 때 즈음엔 이미 이런 상태였다는데 당연하게도 나는 이런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다른 귀족집안은 어떻게 생활하는지 책으로 밖에 접하지 못했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지금의 우리집이 좋다.
하지만 영지를 다시 일으켜서 마을 사람들도 더 살기 좋아지고, 사용인도 더 고용해서 다들 좀더 편하게 일 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집사장 할배도 은퇴해서 여생을 편하게 보낼 수 있게 되고 말이지.
빵과 스프 뿐인 식사였지만 빵은 부드럽고, 스프는 따듯하고 진했다.
28살 먹은 우리집 노처녀 메이드 시에스타는 성격은 좀 괄괄하지만 얼굴도 예쁘고 어떤 재료를 가지고도 맛있는 스프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왜 아직 결혼을 안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부드러운 밀색 머리카락을 길게 땋아 내렸는데 나는 그게 어릴 때부터 폭신폭신해서 좋았다.
“도련님,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시에스타의 목소리다.
나도 모르게 물끄러미 쳐다본 모양이다.
“그냥. 시에스타가 나 어릴 때 치마폭에 앉혀놓고 머리 묶어주고 뽀뽀해준 게 생각나서.”
나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메이드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때는 저도 어렸잖아요!”
옆에 있던 다른 메이드들이 쿡쿡 웃었다.
여자들을 웃게 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씨익 웃었다.
식사가 끝나고 남자 사용인들은 식탁을 정리하고, 메이드들은 잠자리를 준비하러, 어머니와 나는 땔목을 잔뜩 끌어안고 안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니 냉기가 싸늘한 방에 부모님이 함께 쓰시던 낡고 큰 침대와 의자가 두개 딸린 작은 티테이블이 보였다.
침대 머리맡에는 아버지의 초상화가 커다랗게 걸려있다.
아버지는 시원한 얼굴의 미남이었는데 머리칼이 새까맸다. 흔치않은 색이었다.
나 역시 어머니의 머리색은 어디갔는지 아버지처럼 새까만 색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나는 아버지의 머리색을 볼 때마다 우리 아버지구만, 하고 생각하게 됐다. 그랬었다.
아직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릴 것 같다.
내가 잠깐 아버지의 초상화를 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어머니가 벽난로에 불을 때는 소리가 타닥타닥 들려왔다.
겨울엔 땔목도 아낄 겸 안방의 커다란 침대에서 어머니와 시에스타, 또 다른 메이드 레베카. 이렇게 셋이서 같이 잔다.
어머니는 잠시 벽난로의 온기를 느끼다 무릎을 펴며 끙차, 하고 일어섰다.
“레오야.”
“네, 어머니.”
어머니의 표정이 진중했다.
“너한테 중요한 할 말이 있단다.”
“뭔데요?”
“여기 앉아보렴.”
어머니와 작은 티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너를, 아카데미에 보낼 거란다.”
아카데미?!
아카데미라니? 똑똑한 우리 형도 아카데미를 1년 남짓 다니고는 자퇴할 수 밖에 없었는데 내가 무슨 돈으로 학교를 간단 말인가?
집안에 일손도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수확철엔 시에스타도 밀 수확에 힘을 쓰느라 전날 남은 퍽퍽한 빵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많단 말이다.
“어머니, 우리 집에 그럴 여유가 어디있어요. 저 없으면 남은 겨울동안 땔목은 누가 주워오고, 장작은 누가 패겠어요, 봄이 오면 밭도 매야죠, 여름이 되면...,”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나도 학교에 가고 싶다.
나는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고 혼란스럽게 말했다.
어머니의 손이 내 손으로 다가왔다.
따스한 손이 차갑게 식은 내 손을 어루만졌다.
“너한텐 비밀로 했지만 우리 집 지하에 인형이 하나 있단다.”
“‘인형’이오???”
“그래. 그걸 팔면 네 3년 학비는 낼 수 있을 거야.”
“내일 구매자가 와서 잔금을 치르고 인형을 가져가기로 했다.”
인형이 있으면, 형이 학교다닐 때 팔아서 형을 졸업 시켰어야죠!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하지 못했다.
그때 부모님이 얼마나 속상해하셨는지 아니까, 형은 웃으면서 자기는 빨리 돈을 벌고 싶다고 말했지만, 분명 본인이 가장 아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어떤 의문이 들었다.
“형이 입학할 때는 우리집에 남은 코어도 조금 있었잖아요. 그럼 형은 인형사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왜?”
“코어를 구할 수 있느냐는 둘째문제로 치더라도 그 인형,  문제가 있단다.”
“문제요?”
“코어가 있어도 작동을 하지않아.”
어머니가 이어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런 인형을 정상적인 인형값에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단다.”
작동하지 않는 인형은 그냥 유기물덩어리가 아닌가.
그런걸 진짜 인형값에 사는 괴짜가 있다고?
변태 인형 컬렉터일까?
그렇다면 아주 부자일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거 돈을 잔뜩 줬으면 좋겠다.

그날 밤이었다.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아무도 모르게 일어나 등불을 들고 지하로 내려갔다.
인형이라니, 고장나서 다뤄볼 수는 없지만 실물을 한번쯤 보는 건 가능하지 않은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인형이다.
팔아버리기 전에 한번 만져 볼 수는 있지 않는가.
오랜동안 아무도 내려가지않고, 관리할 인력이 없어 방치되어있던 지하계단에는 먼지가 소복히 쌓여있었다.
최근에 누가 인형을 확인하러 내려가긴 했는지 먼지엔 발자국만 몇 개 찍혀있었다.
아마 구매자분과 어머니, 집사님, 인형감정사 정도 겠지.
지하실 문을 열었더니 흰 먼지가 확 피어 올랐다.
새까만 어둠에 내가 비추는 등불 근처에만 먼지들이 너울너울 춤을 췄다.
등불을 들고 안으로 들어서자 쓰지않는 가구들에 흰 천이 쓰여 있어서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가구들 중에 사람 하나가 들어갈 법한 세로로 길고 둥근 가구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 덮인 천에만 먼지가 쌓여있지 않았다.
“이거구나.”
나는 천을 조심히 들어올렸다.
유리로 된 관이 살짝 보였는데 등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사람 발이 보였다.
나는 놀라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게 인형이구나...!
인형일 걸 알면서도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누구라도 이 어두운 곳에서 새하얀 사람발을 봤다면 놀랐을걸?
주저앉은 채로 천을 다시 살짝 들어 그 발을 봤다.
펄이 반짝거리는 아주 연한 분홍색의 메리제인을 신고 있었는데 그 발은 내 손바닥정도의, 내 또래 여자아이가 있다면 이정도 크기겠거니 싶은 발이었다.
나는 과감하게 천을 확 걷어냈다.
신고있는 신발과 같은 색의 펄이 반짝거리는 오프솔더 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유리로 된 관 안에 잠들어 있었다.
요정같은 얼굴을 하고 눈을 감고 편안한 얼굴로 서 있었는데 귀에 씌어진 귀마개같은 금속조각과 쇄골 바로 아래의 옅은 루비색의 코어가 아니면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교한 얼굴이었다.
“코어가 있는데도 정말 작동하지 않는구나.”
작동하진 않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코어 하나를 그대로 꽂아놓은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머리색도 옷과 비슷한 색처럼 보였는데 등불이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다.
자세히 보고싶다.
나는 등불을 내려놓고 유리관을 열려고 시도해봤다.
그냥 열릴 것 같은데 제법 힘을 줘도 쉽게 열리지 않았다.
힘을 더 주자 팍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나는 중심을 잃어 유리관과 함께 앞으로 넘어졌다.
놀라서 눈을 질끈 감았다.
우당탕!
입술에 묘한 촉감이 느껴졌다.
일어나려 양팔에 힘을 주며 눈을 뜨자 선명한 초록색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도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이 섬세한 속눈썹 아래에서 나를 보고있었다.
아니, 보고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인형의 입술이 닿아있었다.
나는 놀라서 아픔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뒷걸음질을 쳤다.
눈을 뜬는 인형이 사람의 움직임으로는 느껴지지않는 속도로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꼿꼿한 자세로 서있는 그의 드레스자락이 팔락 내려왔다.
인형이 말했다.
“주인님?”
인형이 말했다?
코어를 넣어도 움직이지 않는 인형이?
나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소설백업' 카테고리의 다른 글

004  (3) 2024.11.27
003  (0) 2024.11.27
002  (4) 2024.11.27
000 나와 루아의 전투일기  (0) 2024.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