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백업

003

notion6543 2024. 11. 27. 21:32



***

“네?”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빨간 머리 소년은 찡그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브라운 백작이 인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아름다운 인형이야.”
그리고 아쉬운 듯 한숨을 내 쉬었다.
“레오 군의 자의가 아니었다고는 해도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떡하겠나? 내가 포기해야지. 강제로 주인을 바꾸는 행위는 나도 좋아하지 않는다네.”
그는 나와 인형에게 다가오며 이어서 말했다.
“나는 인형을 몹시 좋아하지. 어떤 마법사도 고장의 원인을 찾지못해 방치되었던 인형이 어느날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그건 내게 올 운명이 아니었던 거 겠지.”
브라운 경이 내 머리위에 손을 올리고 통통한 손으로 내 머리를 헝클였다.
으악, 뚱뚱한 아저씨의 손길 불쾌하다!
나는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브라운 백작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을 할려고 이렇게 빙빙 두르지?
“레오군, 내 아들과 대련을 해서 이긴다면 인형은 포기하겠네.”
인형을 포기해...? 이 인형이 내 것이 된다고?
나는 인형을 살짝 바라보았다.
인형도 나를 살짝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재능이 있는 인형사를 방치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않지. 자네를 인형사 아카데미에 보내주겠네. 4년간 사용할 코어도 전부 지원해주지.”
뒤에 서있던 빨간머리 소년이 소리질렀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그렇게 큰 돈을 알지도 못하는 놈한테...!”
“너는 이제 2학년에 올라가지 않느냐, 레오 군은 어제 인형을 처음 만져봤다는데, 설마 이길 자신이 없는거냐?”
그러게, 맞는 말이다. 내가 이길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난 인형을 어제 처음 봤고, 인형에 관련된 서적들을 여러권 읽은게 전부다.
거의 외울만큼 읽었지만, 그 뿐이다.
인형과 통신하는 상태는 겪어보지도 못한, 초보조차 아닌 상태라고.
인형을 가질 수 있어...?
인형사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어...? 꿈같은 소리다.
꿈같은 소리가 꿈처럼 지나가려 한다.
그때, 인형이 내 앞에 와 섰다.
“주인님.”
인형의 보석같은 초록색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바람이 불어와 인형의 밝은 머리칼이 눈부시게 흔들렸다.
레몬색과 핑크색이 물결치듯 너울거렸다.
인형, 루아가 작은 입술을 열었다.
“제 왼쪽 귀의 통신기를 가져가서 착용해주세요. 싸우겠습니다.”
나는 책에서 읽은대로 루아의 양쪽 귀에 달린 금속재질의 통신기에 손을 올렸다.
인형의 얼굴이 가까웠다. 인형은 눈을 감았다.
나는 인형의 왼쪽 귀에 붙어있는 통신기를 돌려 뺐다.
통,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통신기가 빠졌다.
내 왼쪽 귀에 통신기를 끼웠다.
그건 이상한 경험이었다.
내 오른쪽 눈은 평소와 같은 시야였지만, 내 왼쪽 눈엔 루아가 보고있는 내 얼굴이 보였다.
나는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어지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 그런 시야를 가진 것처럼.
“젠장!”
저쪽에서 빨간 머리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나를 노려봤다.
뭐야, 재수없게.
“빨리 끝내자, 자세잡아.”
빨간머리가 호전적으로 자세를 잡았다.
나는 책에서 본대로 왼쪽 눈에 의식을 집중했다.
인형의 시야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루아, 걸어가.’
생각대로 루아가 걸었다.
지금까지의 가벼운 걸음이 아닌, 결의에 찬 듯한 걸음이 느껴져왔다.
행동이 느껴진다는 것.
책으로 읽을 땐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알 수 있다.
올리브색 머리칼의 인형과 10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루아가 마주섰다.
자기 인형 뒤에 서있던 빨간머리가 인형들을 지나쳐 내게 저벅저벅 걸어왔다.
키가 꽤 컸다.
인상을 잔뜩 쓰고는, 비어있는 내 오른쪽 귀를 향해 고개를 숙여 말했다.
“재수없는 놈, 너같은 새끼한테 내가 가질 돈을 쓰게 둘 줄 알아? 네 인형 다음엔 너다, 흠씬 두들겨주지. 너같은 가난뱅이는 인형한테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본 적도 없겠지?”
나는 루아와 의식이 합쳐진 감각을 느끼며 그의 말을 한귀로 흘려보냈다.
뭐라고 지껄이든 상관없다.
책으로만 매일매일 꿈꾸던 감각을 지금 나는 느끼고 있다.
맘이 들떴다.
내가 생각하는대로 루아가 움직인다.
행복해진다.
나는 동작에 익숙해지기 위해 루아를 제자리에서 통통 뛰게 했다.
통통 뛰는 동작에 맞춰 핑크레몬빛 머리칼의 물결이 쳤다.
무릎위까지 오는 풍성한 스커트자락이 팔랑팔랑 흔들렸다.
“처음 조종해보는 것치곤 제법이군. 보통은 그정도 동작에서 어지러워서 넘어지는데 말야.”
나는 루아의 전투기능을 잘 모른다.
이런 경우엔 책에서 본대로 자세한 전투는 루아에게 맡기고 나는 전략적인 판단만 하는 식으로 싸우게 될 것이다.
“선공하게 해주지. 먼저 들어와라.”
빨간머리가 말했다.
‘루아, 공격해.’
인형이 가볍게 뛰어올랐다.
2층 높이쯤.
그리고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 상대방의 인형을 향해 내려꽂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인형은 가볍게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엄청난 속도로 루아의 발이 지면에 꽂혔다.
쿵!
소리와 함께 치맛자락과 긴 머리칼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엄청난 움직임에 루아와 시야를 공유하고 있던 내 눈앞도 엄청나게 어지러웠다.
주저앉았지만 눈을 피하진 않았다.
빨간머리가 외쳤다.
“티르케, 쳐!”
티르케라고 불린 인형이 오른발과 오른 주먹을 뒤로 뺐다.
인형의 주먹이 묵직하게 루아의 얼굴을 향했다.
‘피해!’
명령이 한박자 느렸다.
루아의 얼굴에 상대의 주먹이 꽂혔다.
루아는 드드드득 소리를 내며 그대로 5미터쯤 날라갔다.
내 눈이 같이 핑핑 돌았다.
구역질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고, 루아의 시야에 계속 집중했다.
빨간머리, 타이란은 생각했다.
1학년땐 보통 인형이 한대 맞으면 토하고 굴러다니면서 반나절은 누워서 보내는데 이 녀석은 뭐지?
타이란이 1학년때 자신이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
불쾌하다.
조금쯤 재능있는 녀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인 건 이녀석이 인형사가 되기도 전에 나랑 붙었다는 점이다. 지려야 질 수가 없다.
루아가 일어서자, 티르케의 주먹이 다시 한 번 날아왔다.
인형이 싸울 땐 몸속에서 무게배분이 일어나면서 그때그때 동작에 사람이 낼 수 없는 속도나 무게의 공격을 할 수 있는데, 티르케의 주먹엔 티르케 체중이 대부분 실려있었다.
그 주먹은 100키로의 투포환이다.
루아는 그 주먹을 맞고 또 다시, 이번에는 10미터 가까이를 날아갔다.
삐이이이-, 오른쪽 귀에 이명이 들렸다.
어지러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루아는 더 힘들 것이다.
쓰러진 루아의 곁으로 티르케가 순식간에 날듯이 다가왔다.
티르케의 오른쪽 주먹이 다시 쥐어졌다.
이대로는 안된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봐야 또 얻어맞을 뿐이다.
왼쪽 시야에 집중하고 루아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루아는 조금 느리게 일어서기 시작했다.
빨간머리는 생각했다.
‘티르케의 주먹을 두대나 맞고도 버틴다고? 정신력이 제법인데.’
티르케의 왼발이 땅을 강하게 디뎠다.
그 투포환같은 주먹이 내뻗어지는 그 순간 루아가 무릎을 굽혀 몸을 낮췄다.
그 동작을 본 정원에 있던 모두가 루아가 쓰러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닥에 쓸리는 루아의 하얀 드레스 아래로 오른다리가 날카롭게 뻗어나와 티르케의 왼발을 걸었다.
넘어지려던 티르케는 그대로 뒤로 굴러 다시 일어났다.
“흥, 그런 얕은 수에 당하겠냐!”
빨간머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티르케와 루아가 마주섰다.
당장의 위기에선 벗어났다...!
사실 빨간머리는 지금 상황에 충격을 받았다.
반격을 했어?
초보자가 두대를 얻어맞고 티르케의 발을 걸었다.
그런 정신적 여유가 있단 말인가?
이미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공격이었다.
티르케의 주먹은 강하다.
인형사 아카데미 1학년(이제 2학년에 올라가는)들의 인형 중에서 단연코 주먹의 위력에서만큼은 1위다.
그게 2대가 들어갔는데, 정신을 잃지 않고 반격해온다고?
어떻게 된 놈의 대가리야.
주저앉아있던 어떻게 된 대가리 레오가 천천히 일어섰다.
너무너무 힘들다. 내가 맞은 것도 아닌데 골이 울리고 몸이 벌벌 떨린다.
이게 통신상태....
책에서 읽던 내용대로지만 직접 겪는 건 그 생생함이 다르다.
레오는 명령을 내려 루아를 뒤로 피하게 했다.
루아는 상대를 바라보는 자세 그대로 뒤로 뛰어 후퇴했다.
루아와 레오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전투중인 인형에서 나오는 열감이 레오에게도 전해질 정도의 거리였다.
레오는 인형이 필드를 마구 뛰어다니게 했다.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볼 때, 루아는 전신을 크게 움직이며 싸우는 스피드타입이다.
공격방식은 아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첫공격이 몸을 날린 킥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다리를 주로 쓰지 않을까 싶다.
상대는 파워, 무투타입.
빨간머리가 루아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루아의 회피패턴을 파악하려는 듯 하다.
티르케가 간격을 줄이려 하지만 루아의 속도가 미세하게 더 빠르다.
이대로는 승부가 나지 않는다.
루아가 위로 다시 날아올랐다.
다시 두 다리를 모아 상대를 향해 빠르게 내려꽂는다.
“그 공격밖에 없냐?!”
빨간머리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티르케의 주먹이 루아가 내려꽂히는 방향에 맞춰 날라오기 시작했다.
루아가 공중에서 웅크렸다.
그대로 한바퀴를 돌아 주먹을 피하고 뒷꿈치로 상대의 올리브색 머리를 찍었다.
상대는 앞으로 쓰러졌다.
빨간머리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하지만 곧이어 티르케가 땅을 짚고 빠르게 후퇴했다.
짧은 올리브색 머리칼이 여유롭게 나부꼈다.
빨간머리는 여유를 찾은 듯 가볍게 웃었다.
“제법인데, 아깝네. 학원에 들어간다면 수석도 노려볼만 하겠어. 못 들어가겠지만.”
마음의 여유가 돌아왔다.
방금의 공격은 놀라웠지만 역시 초짜는 초짜.
본적도 없는 재능을 가진 놈이지만 1년이나 인형술을 배운 나를 지금 처음 통신기를 착용해본 녀석이 이길 수는 없다.
그리고 더더욱 이 새끼가 진학하게 둬선 안된다.
이런 새끼가 내 돈으로 학교를 다니고 주목을 받으면 배알이 꼴려서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눌러야한다.
루아가 다시 통통 뛰었다.
처음보다 데미지가 쌓인 지금, 오히려 더 가벼운 점프였다.
‘파악했다.’
레오는 생각했다.
티르케의 해머같은 주먹이 다시 루아를 향했다.
루아에게 명령했다.
루아는 가볍게 뛰어올라 상대의 주먹 위로 올라섰다.
그 자리에서 다시 뛰어오른 옅은 핑크색의 메리제인슈즈가 상대의 팔을 쓸고 턱을 걷어찼다.
티르케가 요란하게 뒤로 넘어갔다.
거기까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루아는 가볍게 날아 쓰러진 티르케의 얼굴에 두 발을 꽂았다.
티르케의 머리가 그대로 정원 바닥에 심겨졌다.
루아는 가볍게 흙바닥에 착지했다.
빨간머리가 바닥에 구토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조종사를 잃은 티르케는 바닥에 머리가 꽂힌 채 일어나지 못했다.
빨간 머리의 아버지, 브라운 백작이 필드 가운데로 들어와서 바닥에 널부러진 자신의 아들을 한 번 바라봤다.
그리고 루아를 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엄청난 물건을 발견한 마니아의 미소였다.
루아는 먼지투성이의 얼굴로 초록색 눈동자를 빛내며 자신의 주인, 레오를 보고 있었다.
브라운 백작이 선언했다.
“전투불능, 레오 군이 이겼네!”
정원에 전투종료의 선언이 울린 그때였다.
루아가 서있던 자리에서 뒤로 쓰러졌다.
나는 급히 달려가 루아의 몸을 받아냈다.
쇄골아래 보여야할 코어가 없었다.
전투로 모두 소진된 것이다.
루아의 몸이 전투의 여운으로 따끈따끈했다.
나 역시 루아를 안은 채 정신을 잃었다.
브라운 백작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레오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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