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백업

002

notion6543 2024. 11. 27. 21:31


***

눈을 떴다.
잊혀지지않을 맑은 초록색의 눈동자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으아악!”
나는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앉았다.
그제서야 그 옆에 앉아있는 시에스타가 보였다.
시에스타가 나를 보며 가슴을 쓸었다.
“도련님! 다행이다, 어디 아프신데는 없으세요?”
“아니, 아니, 저, 저, 저,”
시에스타는 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한 번 슥 봤다.
그 자리엔 어제 본 초록색 눈의 인형이 무표정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 인형!”
시에스타는 절친이라도 소개하듯 인형의 뒤로 가 인형의 두 어깨를 잡고 웃었다.
난 그 황당한 장면에 입만 뻐끔거렸다.
“얘가 주인님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려고 하질 않아요. 그래서 밤새 같이 간호했지 뭐에요.”
“아니, 하지만 고장난 인형이라고....”
“전 잘 모르니까요! 맞아, 큰 주인님 모셔올게요!”
시에스타가 메이드복을 펄럭이며 발랄하게 방을 뛰어나갔다.
“내, 내 방이었구나....”
나는 어색해서 그렇게 말했다.
인형을 힐끔 봤다.
인형은 여전히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구슬같은 초록색 눈망울에는 머리색과 같은 핑크레몬컬러의 속눈썹이 그림자져서 맑게 빛났다.
핑크레몬색의 밝은 머리카락이 직모로 선명하게 내려와 있었는데 머리칼의 끝은 은빛 물결처럼 빛나고 있어서 정말로 흐르는 듯 느껴졌다.
결이 흐르는 긴 머리칼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귀마개를 닮은 하얀 금속이 아니었다면 어딘가의 살아있는 공주님만 같았다.
“예쁘다....”
새하얗게만 보이던 인형의 얼굴에 문득 홍조가 올라왔다.
착각인가...?
인형의 고개가 나를 향했다.
“주인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인형의 입이 열리고 소리가 나왔다.
“아니, 주인님...?”
오늘 구매자가 온다고 하지 않았나?
고쳐졌으니 좋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형은 한 번 각인된 주인 외에는 섬기지 않는다고 했다.
주인을 바꿀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굉장히 복잡하고, 인형을 많이 훼손하게 되는 방법이라 보통은 행하지 않는다.
이 인형을 구매자에게 각인 시킬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곤란하다.
미리 받은 선금도 뱉어내야 할 것이다.
어떡하지?
어떻게 수습하지?
그 때,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오셨다.
“레오! 시에스타에게 들었단다! 일어났구나!”
“어머니!”
“몸상태는 괜찮은 모양이니 다행이구나, 그래도 디토가 의사선생님을 모시러 갔으니 진료는 받아보자꾸나.”
디토는 우리집 유일한 풋맨인데 보통 풋맨들이 입는 멋진 정장이 아니라 힘쓰는 일을 하기 편한 노동복을 입고있을 때가 더 많았다.
의사가 온다는 말에 나는 그제서야 내 몸을 더듬어봤다.
아프긴 커녕 어디 긁힌 자국 하나 없었다.
“아뇨! 어머니, 저 괜찮아요, 아무데도 안 다쳤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잖니.”
어머니가 말씀하시며 이마를 쓸어주셨다.
따스한 손에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
나는 그제야 떨떠름하게나마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어머니, 저, 인형을 함부로 건드려서 죄송해요.”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기만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온화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이 인형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한게 많지? 이 엄마도 아무 것도 모르니 곧 오실 손님이 모셔오실 전문가분께 여쭤보자꾸나. 엄마도 무척 궁금하구나.”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침착하신 편이었다.
어머니가 인형의 손을 잡았다.
“루아, 우리집엔 코어를 더 구할 여유가 없으니 아껴써야 한다.”
인형이 눈을 깜박이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네, 어머님.”
코어는 연료같은 것이어서 사용하는 만큼 소모된다.
인형의 쇄골 바로 아래 피부에 코어를 밀어넣으면 그 부분만 동그랗게 피부가 보석으로 바뀐 것처럼 색이 바뀌는데, 인형이 활동하는 만큼 소모되어 점점 그 영역이 작아진다.
움직임이 크거나, 복잡한 전투기술을 구사했을 때 빠르게 소모되어 일상생활만으로는 1년, 꾸준히 대련을 하는 경우 한달, 격렬한 전투를 하는 경우 한시간도 버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그건 예전에 인형이 전쟁에 사용되었을 때의 얘기라고 한다.
코어가 전부 소모되어 원래의 피부색으로 돌아오면 인형은 작동을 멈춘다.
지금 인형, 루아가 품고 있는 딸기 한알만한 크기의 코어면 일상생활로 딱 한달정도 버틸 수 있는 사이즈다.
“어머니, 인형을 못팔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며 손뼉을 딱 쳤다.
“그래, 아카데미는 좀더 고민해보자꾸나. 이제 인형이 있으니 인형사 아카데미에 가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루아를 기동시킬 코어를 계속 구하는게 힘들겠지...?”
어머니는 즐거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어이없어, 지금 내가 이렇게 큰 사고를 쳤는데.
“구매자분께 환불을 해드려야....”
“그건 걱정말렴, 인형을 판 돈은 어차피 전부 네 기숙 아카데미 등록금이었으니, 하나도 안쓰고 그대로 갖고있단다.”
어머니는 인형을 바라보며 그 손을 살포시 잡았다.
“루아,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널 봤단다. 넌 내 공주님이었어. 네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너무 좋구나.”
인형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어머니께 화답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태어나기 전부터 결혼하기로 약속된 사이였다고 한다.
어린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두 사람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항상 친구처럼 친했었다.
지금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계시지만....
“아참, 몸상태가 괜찮은 것 같으니 가서 아침 먹을까?”
“네!”
나와 어머니, 시에스타는 1층 동쪽 끝의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 우리 뒤를 인형이 졸졸 따라왔다.
코어의 소모를 줄이기 위해서인지 발만 살풋살풋 움직여 걷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걸음으로 걷고 있는 우리들을 아주 편안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조금...부담스럽다.
잠시나마 인형의 주인이 되었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만 자꾸 커져서 지금 상황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꾸역꾸역 아침을 먹고, 왕진 와주신 의사선생님께 진료를 받는 중에도, 인형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내 옆에 서서 내가 진료받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의사선생님이 돌아가시고(당연하게도 내 몸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곧 인형을 데려갈 손님이 올 시간이 되었다.
어머니가 나를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역시 더욱 긴장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마주보았다.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엄마가 알아서 할테니, 너는 그냥 죄송한 표정으로 옆에 있어주기만 해.”
그리고 어머니는 그대로 인형을 바라보았다.
“루아는 잠시 레오의 방에 가있지 않겠니?”
인형은 어머니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었다.
“레오, 네가 루아한테 명령해보겠니?”
“제, 제가요?”
“그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진 모르지만 루아는 지금 당장은 네 인형이잖니.”
인형, 루아를 나는 조심스럽게 쳐다봤다.
인형은 무표정한 얼굴로 얌전히 두손을 모은 채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 루아.”
처음 보는 영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기분이 들어 너무너무 어색하다.
루아는 살짝 미소지었다.
“네, 주인님.”
“내가 부를 때까지 내 방에 잠시 가있어 줄래?”
“네, 주인님.”
인형은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고는 팔랑팔랑 걸어 복도로 사라졌다.
얼떨떨했다.
잠깐이지만 인형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머니는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더니 살짝 웃어보이셨다.
잠시후, 다그닥다그닥, 우리집 정원으로 들어서는 마차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인형을 사러오신 손님일 것이다.
침을 꿀꺽 삼켰다.
집사장과 우리집 유일한 풋맨 디토가 우리집 정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맞이하러 갔다.
정원에 들어선 2대의 마차는 총 4마리의 말이 끌고 있었는데, 앞의 마차에선 2명의 남자하인과 40대쯤 되어보이는 붉은 머리의 뚱뚱한 귀족남자가 내렸다.
뒤따라온 마차에선 1명의 여자하인과 내 또래로 보이는 똑같은 붉은 머리의 키 큰 소년, 그리고 인형감정사로 보이는 마법사가 함께 내렸다.
붉은머리의 소년은 손님의 아들이 아닐까?
마부들은 우리집 집사장이 지시한 곳으로 마차를 끌고 사라졌다.
귀족남자가 밝은 미소와 함께 두팔을 벌리며 우리를 향했다.
“배크힌 부인! 일주일 만이군요!”
어머니는 살짝 미소띈 얼굴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나도 그 옆에서 어머니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의 두 손에 땀이 축축했다.
고개를 든 어머니는 종종걸음으로 그 귀족남자에게 다가갔다.
그 뒤에서 삐딱한 자세로 선 키 큰 빨간머리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한쪽 귀에 파르스름하게 잘 연마된 금속 조각을 끼고 있었는데, 그것은 인형의 주인만 가질 수 있는 자기 인형과의 통신도구였다.
와, 부럽다.
나는 상황의 심각성을 잠시 잊고 그런 생각을 하며 멀뚱히 소년을 바라봤다.
어머니와 귀족남자는 뭔가를 한참 얘기를 나누시더니 남자의 표정이 심각하게 바뀌었다.
남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살찐 두 볼위에 눈이 번들거렸다.
“배크힌 군이지?”
남자가 말했다.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다.
“레오 배크힌이라고 합니다.”
남자는 심각한 얼굴로 그 뚱뚱한 입술을 열었다.
“나는 헤이든 브라운이라고 하네. 인형을 데리고 와줄 수 있겠나? 상태를 한번 보고싶군.”
“네, 네!”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상도 못한 반응이었다.
분명히 변태 인형 컬렉터일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허겁지겁 집에 들어가 내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여니 문 바로 앞에 두손을 앞에 얌전히 모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인형이 보였다.
인형, 이제 어떻게 되는걸까?
“루아.”
나는 인형을 불렀다.
인형이 눈을 떴다.
“네, 주인님.”
“가자.”
“네, 주인님.”
나는 앞서 걸으며 인형에게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인형의 반응이 궁금해 얼굴을 살폈지만 그는 발아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깜빡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하긴, 인형이란 표정도 한정적이고, 어휘도 한정적이어서 아주 간단한 의사표현밖에 하지 못한다.
옛날엔 인형들이 복잡한 표정과 다양한 어휘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인간이란 헝겊쪼가리와 깨진 단추로 만든 곰인형에도 정을 붙이고, 이름을 붙여주는 생물이다.
하물며 이렇게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을 한 인형이, 걷고, 말하고, 웃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인형과 결혼하는 사람이 생겨났었다.
지금도 물론 있다. 하지만 좀더 심했었다고 한다.
귀족들은 계산적인 이유로 결혼하는 경우도 많으니 평범하게 귀족 여성을 부인으로 두고, 인형을 본처처럼 대하는 귀족 남성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 것이 사회문제가 되면서 인형을 제작할 때 표정과 어휘를 제한하게 되었다고 한다.
남자 인형도 있지만, 귀족여성은 결혼에 대한 선택권이 약해서 상대적으로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튼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다.
눈 앞에 브라운 백작이 보였다.
뒤에는 여전히 삐딱하게 서있는 붉은머리 소년이 있었는데, 그 옆에 아름다운 모습의 소녀가 함께 서있었다.
짧은 올리브빛 머리카락, 쇄골 바로 아래의 연두색 코어, 그리고 오른쪽 귀에는 소년과 한쌍으로 보이는 푸르스름한 금속조각.
인형이다.
브라운 백작이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괜히 불길해지는 표정이었다.
옆에서 어머니가 당황한 얼굴로 두손을 꼭 모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웃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레오 군, 내 아들과 대련을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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